'24년 9월 19일 문호준, 장충동에서
## 인사말
이 편지를 굳이 읽고 있다는 건, 지금 내 선택을 후회하고 있거나 내 선택이 맞았는지 의심이 들어서겠지. 이해한다. 나도 지금 모든 걸 알고 선택을 내리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걸 알고 선택을 할 순 없다. 지금 내게 최선인 길이 알고 보면 미래의 너에게 최악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지금 내게 최선인 길을 골라야 한다. 미안하다. 그래도 적어도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 선택 : 선박 금융 전문가 vs 보험 계리사
연구자의 길을 포기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그 동안 정말 많이 고민했다.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그 중 고르고 골라서 남은 것이 선박금융과 보험 계리사, 이 두 가지 길이다. 각 길은 적어도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고 확실한 장점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그간 쳐냈던 다른 길들과 달리 이 두 길은 쉽게 쳐낼 수가 없다.
### 선박 금융 전문가
선박회사 혹은 선박 투자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선박 건조 자금을 모으고 운용하는 직업.
#### 장점
##### 해운 커리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결국 내 포트폴리오를 보면 해운 관련 활동이 거의 대부분이고 지금 다니는 회사도 해운 회사다. 좋게 생각하면 해운 또는 해운 관련 분야에 있어서는 적어도 포트폴리오 걱정을 덜 해도 된다는 뜻이다.
##### 자산 운용
일단 내가 자산 운용 직무에 판타지가 있는 건 사실이고, 이런 판타지를 완전히 외면할 순 없다. 선박 금융 쪽으로 가게 되면 내가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자산 운용 직무를 맡을 수 있다.
#### 단점
##### 불확실성
###### 현재 직무와 불일치 -> 이직 가능성
선박 금융 전문가의 길을 걸어갈 때 문제점 중 하나는 지금 당장 내 직무가 선박 금융과 관련된 직무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박 금융 관련 직무는 재무 직무로 전략팀에 해당하는데 나는 지금 전략팀에 있지 않다. 또한, 전략팀에 간다고 해도 얼라이언스를 구성하는 HMM 같은 주류 선사의 투자 기획 업무와는 다른 업무를 하기 때문에 마냥 관련 직무라고 보기 힘들다. 이로 인해 이직을 할 때 HMM 투자 기획 직무로 이직을 한 다음 선박 금융으로 이직을 해야 하는 이중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 업무의 전문성
선박 금융 '전문가'가 정말 '전문가'인지도 불확실하다. 일단 구체적으로 선박 금융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보가 너무 부족하며, 해당 분야의 주류는 해양대 해기사들과 명문대 상경 계열이기 때문에 정보를 얻을 채널도 없다. 또한, 이 두 주류들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실제 업무에서 전문성보다는 학벌과 네트워킹이 중요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 연봉
선박 금융의 경우 대체로 연봉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정보가 거의 없다. 어느 정도 연봉 하락을 감수할 마음은 있지만, 연봉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건 너무 위험하다. 주은이와 같이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에 연봉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적성
###### 언어
실제 선박 금융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높은 수준의 영어 S&W이고 현직자 대부분이 해외 유학을 갔다온 사람들이다. 실제 업무 관련 글에서도 선순위 채권자와 후순위 채권자들과 영어 또는 중국어로 전화나 메일을 주고 받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건 지금 회사에서 내부적으로 영어 메일을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편이다. 읽고 쓰기에서는 습득 능력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지만, 회화에서 너무 떨어진다. 재능의 부족일 수도 있고, 유년기에 영어 회화를 할 경험을 갖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가 회화 능력이 부족한 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화 능력이 매우 중요한 선박 금융 쪽으로 길을 잡는 것은 적성과 정반대로 가는 것일 수 있다.
###### 네트워킹
자산 운용 직무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네트워킹이다. 의사결정을 내릴 때 비공식적인 중요 정보를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고,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네트워킹은 거의 절대적으로 학벌을 기반으로 한다. 해양대 해기사들의 네트워킹과 명문대 상경 계열의 네트워킹을 부산대 통계학과를 나온 내가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네트워킹을 포기하면 핵심 역량 중 하나를 포기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 보험 계리사
국내외 보험상품 관련 제도를 조사하고, 소비자심리 및 보험료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하는 일을 하는 보험 및 금융 상품 개발자.
#### 장점
##### 확실성
###### R&R
계리사는 이직이 매우 활발한 만큼 업계 전체에서 공유되는 R&R이 확실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고려해운처럼 느슨한 R&R로 그때 그때 사측 편의에 따라 업무가 배정될 가능성이 낮고, 그럴 경우에도 그냥 이직을 하면 된다.
###### 연봉과 대출, 그리고 복지
계리사는 연봉 정보가 많이 있으며, 메이저 보험사에 취직할 경우 지금 연봉과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전문직 대출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내 대출 같은 제도를 걱정할 이유도 적다. 복지도 비슷한 이유로 걱정할 이유가 없다.
##### 적성
###### 수리 이론
실제 계리 업무에서 수리 이론이 중요할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계리사라는 자격증을 딸 때 내가 가진 수리 이론에 대한 지식과 진지함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모든 현직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수리 이론을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업무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 아카데믹
전문직과 비전문직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아카데믹의 여부, 즉 실제 업무가 추상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이뤄지는지 여부이다. 지금 고려해운에서 하는 내 업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는 아니지만, 업무에 물류 관련 이론은 단 하나도 쓰이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역량과 경험을 바탕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이에 반해 회계사나 변호사, 계리사의 경우 실제 업무가 추상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이 덕분에 자신의 노동의 바탕이 회사의 시스템이 아닌 자신의 능력에 있게 된다.
##### 근무 외 소득
내가 늘 바라던 것 중 하나는 내 메인 직업과 별개의 소득이 존재했으면 하는 점이었다. 계리사가 되면 이 점이 쉽게 해결된다. 계리사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니즈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강의를 함으로써 제 2의 소득을 가질 수 있다.
#### 단점
##### 해운 커리어
적하 보험이나 해상 보험으로 갈 경우 완전히 커리어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그간 해운 관련 포트폴리오는 사용하기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내 포트폴리오 자체가 거의 공백에 가까워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 난이도
불확실성이 문제지 커리어를 쌓기만 하면 이직 난이도는 낮은 선박 금융과 달리 계리사는 확실하지만 이직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많이 높은 편이다. 과거 한창 공부만 하던 시절의 내가 아니다. 나는 수리 이론을 2년 넘게 놓은 상황이고 다시 처음부터 공부해야 할 수도 있다.
## 선택 : 보험 계리사
선박 금융과 보험 계리사, 두 길의 장단점을 모두 감안하여 고민한 결과 나는 보험 계리사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 이유 1 : 감당하기 힘든 불확실성
첫 번째 이유는 선박 금융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업무는 어떤지, 연봉은 어떤지, 사람은 얼마나 뽑는지, 커리어는 어떻게 쌓는지 거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 않고 비공개 정보를 얻을 채널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경제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있겠지만, 나는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 약자인 상황이다.
### 이유 2 : 적성
두 번째 이유는 선박 금융보다 보험 계리사 쪽이 내 적성과 맞다는 점이다. 적성은 이직 단계에서도 중요하지만, 이직하고 난 후에도 중요하다. 선박 금융에서 요구하는 언어적 능력과 네트워킹 능력은 내 적성과 맞지 않고, 이 요구 능력과 적성의 불일치는 내가 해당 업무를 맡는 동안 계속해서 나를 괴롭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 이유 3 : 나의 행복 조건
마지막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는 보험 계리사의 여러 측면이 나의 행복 조건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과거 경험을 반추했을 때 나는 (1) 주은이와 느긋하게 놀 때, (2) 누군가에게 굳이 내 능력을 검증 안 해도 될 때, (3) 내가 아는 걸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줄 때, (4) 다른 사람들이 내 능력을 알아줄 때 행복함을 느낀다. 보험 계리사의 길을 걷게 되면 이 모든 조건이 달성된다.
(1) 선박 금융과 달리 보험 계리사는 적어도 주 5일, 9 to 6가 보장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주말에 주은이와 같이 데이트를 하거나, 좀 더 멀리 봤을 때 미래 내 자식과 같이 추억을 쌓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화목한 가정보다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은 없다. 이 조건 하나로도 계리사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하다.
(2) 계리사는 비록 면허는 아니지만 전문 자격증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굳이 계리 분야에 있어 나의 전문성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3) 일단 계리 업무에서 중요한 수리 이론 부분은 내 성향상 정말 깊게 공부할 가능성이 높고, 설명해주는 걸 좋아하는 내 성향상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수리 이론을 설명해줄 일이 많을 것이다.
(4) (2)와 (3)과 비슷하다. 내 성향상 수리 이론 하나는 엄청나게 깊게 팔 가능성이 높고, 전문 자격증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능력을 폄하 받는 일도 적을 것이다.
## 마치면서
연구자의 길을 그만두었을 때 나는 모든 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간 내가 가져왔던 꿈들, 그려왔던 미래,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모든 걸 잃어버린 상태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참 많이 방황했던 것 같다. 계리사, 변호사, 개발자, 자산 운용사, 프랍 트레이더, ML 엔지니어, CFA, 그리고 지금의 선사. 이 길 저 길 한 번은 다 둘러봤다. 그 간 너무 한 길만 걸어와서 다른 길은 하나도 몰랐기에, 그리고 이제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내게 계리사는 계륵이었다. 내게 잘 맞을 거 같긴 한데, 완벽하지는 않은 길. 자산 운용사처럼 돈을 엄청나게 벌 수도 없고, 개발자처럼 내가 혼자서 상품을 만들 수도 없고, 변호사처럼 나중에 내 사업을 할 수도 없는 길. 그래서 그 동안 정말 많이 입에 오르내렸고, 심심하면 계리사를 하겠다고 말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심하지만, 그 만큼 계리사는 내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엄청난 연봉'과 '혼자서 상품 만들기', '내 사업' 등 모두 다 내가 포기한 연구자의 길에 대한 보상 심리가 아니었을까. 연구자의 길을 포기하면서 생긴 내 마음의 구멍을 거대한 성공으로 덮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일종의 마약성 진통제처럼.
이제 그만 나를 위해 살자. 남이 아닌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자. 주은이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나 자신이 호기심을 느끼고 탐구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할 수 있다. 비록 지식은 잃어버렸지만, 진지한 태도가 아직 내 마음 속에 있다. 내 진지한 태도를 믿자. 나를 믿어주는 주은이를 믿자.
힘내라, 문호준!